국회의원 유승희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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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에게 쓰는 편지
아버지‘유병린’씨는? 17대 국회의원 유승희의 부친, 유병린 님은 1929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청주중학교, 연세대 영문과, 연세대 행정대학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전신인 한미합동경제위원회를 시작으로 30년간을 경제 부처에서 공직자로 일하셨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과 싱가포르 동남아 신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셨으며, 경실련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운영위원으로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셨다. 70세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최근에는 사직공원 내 황학정에서 사두(국궁 : 전통 활쏘기 모임의 회장)로 활동하시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계신다. 승희야, 승희야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일에 태어난 아이 1960년 4월 26일 큰 딸 승희가 태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던 날 태어났다고 해서 집에서는 '민혜(民惠)'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베푸신 날이었으므로 어릴 적 이름을 그렇게 붙여준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성당 유치원에서 송 아우구스틴 수녀님의 부드럽고 다정한 교육을 받았다. 바르고 명랑하게 자라게 해 준 송수녀님을 잊을 수가 없다. 중학교 시절 교회에 잘 다녔으며 친구들과 잘 어울려 명랑한 소녀, 똑똑한 소녀로 성장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야간 자율 학습도 없던 시절인데도 도시락을 두 개 싸가지고 학교에서 저녁까지 먹고 도서관에서 밤 10시까지 공부할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했고 인내심도 강해 마치 어른 같았다.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더니 승희는 교회 모임, 학교 모임도 많고 친구도 많아서 쉬는 날도 늘 밤늦게 집에 들어와 꾸지람을 많이 들었지만 부모의 어려움을 보살필 줄 아는 사려 깊은 딸이었다. 승희는 1978년도에 이화여대 인문사회계열에 입학했는데 3학년 때 사회학과를 선택했다. 나는 승희가 영문과에 가기를 원했는데 의논 한 마디 없이 사회학과를 선택한 것이 아쉬웠다. 승희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는데 특히 영어 성적은 항상 1등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영문과를 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도 연대 영문과를 나왔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 당시 인문사회계열 학생 대부분이 영문과를 선택했는데 남들 다 가는 과를 선택하지 않고 사회학과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당시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승희는 3학년 2학기 때 돌연히 기독교학과로 전과를 했다. 기독교 학과를 부전공에서 전공으로 바꾸고 사회학과를 부전공을 한 것이다. 그 일도 아버지에게 의논 없이 결정한 후에 통보를 해왔는데 그 때 나는 얼마나 노발대발 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때부터 신학과 철학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대학을 들어가면 철학과나 기독교학과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졸업할 때 기독교학과 졸업생은 승희 한 명뿐이었다. 다른 한 명은 조기졸업을 해서 지금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다. 그러니까 승희의 과 동기생은 한 명밖에 없는 셈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승희는 영등포 도림장로교회에서 <지역사회개발원> 간사로 낮에는 근무하고 저녁에는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밤 10시까지 가르쳤다. 내가 시술연구실장으로 있을 때 가끔 출근길에 승희와 신문로까지 걸어가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 영등포 도림교회까지 가려면 한 시간 이상 가야 하는 먼 거리인데도 승희는 일부러 나와 함께 기술연구소가 있는 마포까지 가서 길 옆 다방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다 가곤 했다. 헤어질 때 내가 버스 정류장 앞까지 따라가서 천 원짜리 한두 장이라도 손에 쥐어주면 괜찮다고 뿌리치며 뛰어가 버렸다. 여하튼 당시 승희는 구로수출공단에 위치한 <산돌문화원>에서 보수 없이 10여 년간을 밤낮 가리지 않고 수출 공단 근로자들을 가르치느라 바빴다. 최저 임금을 받고 일하는 그곳 근로자들은 '닭장'이라 부리는 숙소에서 생활했다. 언젠가 승희를 따라 직접 가본 그곳에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몇 평 안되는 방에서 거주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딱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승희는 전력으로 그들을 위해 봉사했다. 수입도 없이 문화원에 다니는 딸을 보고 '개똥철학'을 버리라는 엄마의 충고도 듣지 않았다. 모임도 많고 친구도 많아서 쉬는 날도 밤늦게 집에 돌아와 꾸지람도 많이 들었지만 그 소신을 바꿀 수 없었다. 도림교회 <지역사회 개발원>에서도, 교회에서 근무한다고 하지만 용돈도 안되는 월 10만 원의 월급을 받고도 불평 없이 항상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보고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또 노동자들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신발도 3천원짜리를 동네 구둣방에서 사서 신었고 입고 다니는 옷도 허술하기가 촌 여자와 같았으며 평소에 화장도 안하고 다녔다. 그러나 마음 편하고 소박한 여자로 성장한 것이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알량한 10만원 월급에서 매달 5만원씩 적금을 부어 일년 뒤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해 나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결국 기독교학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방자치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노동문제에 관한 연구과정도 수료했다. 소신은 지키되 부모의 어려움을 보살필 줄 아는 사려 깊은 딸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딸을 이 세상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가정에 지상낙원을 꽃피우게 하소서 승희의 결혼 승희는 탄생하는 순간 내가 아버지가 되면서 가져야 할 묵직한 책임감을 가슴 벅찬 기쁨과 함께 깨닫게 했고, 어느 순간 어른이 된 자식을 내 품에서 떼어놓을 때 말할 수 없는 아쉬움과 설렘을 경험하게 했다. 1984년 승희가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하기 한 해 전 겨울, 이미 양가 부모가 만나 인사했고 약혼식은 생략하고 봄에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약혼식도 결혼식도 모두 치르고 싶었고 서운하지 않을 만큼 혼수도 마련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혼사를 치르려고 하니 딸을 셋이나 두고도 이런 날들을 위해 통장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 큰 짐이 되는 것이었다. 아내는 양가 부모가 만난 뒤 하루라도 빨리 결혼시키자고 주장했으나, 나는 사윗감이 아직 생활 기반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나의 큰딸이 자신의 배필을 데려왔을 때 여느 젊은이들과 달리 앞으로 사회를 위해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점이 맘에 들었지만, 아무래도 경제적 기반이 부실하다는 것 때문에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왕이면 윤택한 집안의 자식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승희는 겨울을 넘기고 봄에 결혼할 뜻을 분명히 밝혔고 큰 딸의 결혼을 서두르는 아내와 나는 힘겨운 타협을 해 약혼식을 생략하되 결혼식은 봄에 올리기로 했다. 아내는 이왕이면 내가 기관장으로 재직할 때 결혼했어야 했다고 불평이 여간 아니었다. 어느 집안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혼사를 앞두고 부모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날들을 위해 이유야 어찌됐든 저금통장을 따로 만들어 결혼하는 자식들 용돈이라도 모아두었어야 한다고 얼마나 후회했던지! 빈 주먹으로 아버지가 앉아 있으니 아내가 하는대로 따라갈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약혼식을 생략하기로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친지 몇 사람과 우리 가족이 모여 결혼 축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함께 하자고 연락을 했다. 승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셋째 형님께서 1백만원을 보내주셨다. 조카 목사에게 신랑이 함을 가져오는 날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1984년 5월 12일 토요일. 날씨가 좀 흐렸으나 결혼식에는 지장이 없었고 생각보다 많은 축하객이 찾아와주었다. 경사스러운 날 찾아와 준 많은 하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결혼식 사회자의 아버지, 빵집 앞에서 만나요.승희는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검소한 생활을 해왔다. 결혼식 날 처음으로 하이힐을 신어보았고 화장도 그 날 처음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학 시절에는 물론이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 동네 구두닦이 집에서 파는 3천원~5천원짜리 구두를 사 신고 다닐 정도였다. 1991년 1월 7일 큰 딸 승희가 롯데 백화점에서 전화를 했다. 사무실 가까운 곳에 왔으니 차 한 잔 하자는 것이다. 롯데 백화점 옆 제일은행 소공동 지점의 고객 대기 장소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큰 딸 승희는 아버지를 만날 때도 친구들을 만날 때처럼 서점이나 은행 혹은 빵집 앞 같은 돈 안 드는 곳을 택하곤 했다. 승희는 만삭의 몸을 하고서도 일이 바빠서인지 늘 부산하게 사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게다가 꾀죄죄한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초라하고 추워 보였다. 겨울 외투가 없느냐고 물으니 대학 때 입었던 코트가 있긴 한데 너무 무거워서 가벼운 바바리 코트를 입고 다닌다고 한다. 나는 승희를 보내고 퇴근길에 롯데 백화점으로 다시 가서 승희에게 사 줄 코트를 점 찍어두고 왔다. 그 매장에 다음날 오후 다시 갔을 땐 점 찍었던 옷은 벌써 누군가에게 팔렸기 때문에 다른 점포에서 가벼운 털로 된 외투를 하나 샀다. 곧바로 경실련에서 일하는 사위에게 갖다주고 기분이 흐뭇해져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승희는 아버지가 사준 외투가 너무 고급품이라 입고 다닐 수가 없다고 한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매일 만나 교육을 하는 처지에도 그렇고 교회에도 입고 가기 민망하니 다른 옷으로 바꿔야겠다는 것이다. 산돌교회는 구로공단 지역의 노동 청년들이 모이는 가난한 근로자 교회였던 것이다. 승희는 백화점으로 다시 가서 그 옷을 반환하고 좀 더 싼 외투로 바꾸고 남은 돈으로 승연이 가죽 점퍼를 샀다. 나의 첫 손녀가 태어났다. 재준이도 승연이도 아직 미혼이니 외손녀라고 해도 내겐 첫 자식을 얻은 것만큼 기쁘고 신기했다. 산모도 아이도 모두 건강했다. 결혼한 지 수년 만에 자식을 얻은 승희나 사위는 남보다 더 기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시름 많고 할 일 많은 할아버지이지만 수선이를 보면 생명의 신비로움에 감탄할 뿐이었다. 또 엄마가 된 딸이 더욱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병원에서 출산을 하고 퇴원한 날부터 일주일동안 나는 매일 승희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승희가 산후 조리를 하며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하길 바랬지만, 남들보다 더 바쁘고 힘겹게 살다가 산고를 치른 상태이니 혹 건강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여리디 여린 제 딸을 바라보는 딸의 눈길이 전에 없이 부드럽게만 느껴진다. 승희는 아이를 월요일 아침부터 탁아소에 맡기고 매일밤 늦게 집으로 데려가는 생활을 했다. 그렇게 토요일이 되면 아이를 얼싸안고 기뻐하는 딸과 외손녀를 보고는 하나님께서 제 외손녀인 수선이를 안쓰럽게 생각하시어 그 아이에 대한 부모의 부족한 사정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채워달라는 기도를 올렸고 TV 위에 ‘시간을 내서 수선이를 더욱 사랑해주라’는 쪽지를 세워놓았다. 승희의 출마 승희는 그와 같이 힘들고 허둥지둥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1995년 시의회 의원으로 출마했다. 선거 사무실은 자신이 사는 20평짜리 아파트 창문에 ‘유승희 선거 사무실’이라는 현수막을 하나 매어놓은 게 다였다. 승희의 사무실 개소식에 가보니 시민, 노동단체 지도자들과 각 분야의 교수님들과 친척, 유권자들이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개소식이 끝난 뒤엔 참석자들이 구역별로 조를 편성해 홍보 활동도 벌였다. 후보자 홍보용 전단을 거리에서 나눠주는 데 나도 동참했다. 며칠 후 어느 예식장 지하실을 빌려 개인 연설회를 가졌다. ‘모래시계’ 드라마 작가 송지나 씨가 찬조 연설자로 나섰다. 그리고 국회 여성 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이우정 의원이 격려의 인사로 승희의 손을 들어줄 때 장내가 떠나도록 박수를 받았다. 큰 딸의 성격까지 잘 아는 친한 친구인 유명한 방송 작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서 유승희처럼 순수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지자체에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해 만사 제쳐놓고 달려왔다고 말할 때, 무척 기쁘고 감사했다. 선거를 치르면서 선거자금 없이 전적으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이 먹는 김치와 반찬과 쌀 등을 모두 자원봉사자들이 가져와 선거를 치렀는데 현역인 시의원보다 두 배가 넘는 압도적인 표 차로 전국에서(서울 포함) 2위로 당선되었다. 돈 안드는 선거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그동안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학업을 계속하여 2007년 2월 한양 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만날 때마다 입술이 터져 있고 하품을 자주 하며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고 늘 바쁘고 지친 생활을 계속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항상 같이 하시길 아침 저녁으로 호소의 기도를 올릴 뿐이다. 최근 국회에서 공청회와 토론회를 주관하여 훌륭하게 사회를 진행해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끝날 때까지 2시간 이상 방청석을 지키는 것이 마음 흐뭇하다. 이제 과학정보통신 분야에서는 당당한 전문가가 된 것 같아 마음 든든하다. 끝으로 지난 날 승희가 원했던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기도문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되새겨본다.  “아빠는 믿음으로 가정을 다스리고 엄마는 사랑으로 아이를 훈육하고 자녀는 순종으로 어른을 공경하고 아빠는 말씀 보며 엄마는 기도하고 자녀는 찬송하며 가정에 지상낙원을 꽃피우게 하소서”
남편 ‘유종성’씨는? 1956년 전북 정읍 출생인 유승희(兪承希) 위원장의 남편 유종성(柳鍾星)씨는 돈암초등학교, 전농중학교, 중앙고등학교와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민주화투쟁으로 세 차례의 옥고와 두 차례의 제명을 당했으며,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간사(1979-80), 한국 YMCA전국연맹 간사(1982-88), 민주쟁취 국민운동 서울본부 사무차장(1987-88), 문동환 국회의원 보좌관(1988-90),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기획/정책실장(1990-96)과 사무총장(1997-99)을 역임했다. 이후 만학으로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2001)와 공공정책학 박사학위(2006)를 취득하고, 캘리포니아 샌디에고대학교(UC San Diego)의 국제대학원 (IR/PS)에서 교수로 재직 중(2006-현재)이다. 전북지사와 김대중 대통령 경제고문을 지낸 유종근씨와 민주통합당의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와 친형제지간이며, 부인 유승희 의원과 슬하에 딸 수선 양을 두고 있다.[출처] 딸의 미래를 위해 함께 뛰는 외조의 기쁨 (남편 유종성)|작성자 유승희 딸의 미래를 위해 함께 뛰는 외조의 기쁨(유승희 의원 남편 유종성) 나는 정치인 유승희의 적극적인 지지자이다.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예비후보 유승희의 남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추운 겨울에 국회의원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고, 예비후보자들은 선거사무소를 개설하고 대형 현수막을 내거는 한편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인 명함 배부에 나선다. 우리나라의 까다롭고 비민주적인 규제 일변도의 선거법은 현역이 아니면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거의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원시적인 형태의 명함배부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명함 배부를 아무나 할 수도 없다. 예비후보자와 배우자 및 직계가족만이 자유롭게 명함을 배부할 수 있다. 대다수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예비후보자의 명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조차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 이러고도 우리나라가 선진화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금품 타락선거를 규제한다는 명목으로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억압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후보시절 BBK 의혹을 제기한 정봉주 전의원에 대한 유죄확정 및 구속수감은 한국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얻게 한다. 이미 한국은 이명박 정권하에서 언론자유의 상태에 대한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의 평가에서 “자유로움”(Free)에서 “부분적으로 자유로움”(Partly Free)으로 강등 당하는 불명예를 당하였다. 선진화를 한다는 이명박 정권이 후진화를 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이명박 정권과 보수세력은 걸핏하면 대북 화해와 협력을 주장하는 야권을 종북주의로 몰아 부치지만, “자유롭지 않음”(Not Free)으로 평가받는 북한과 비슷한 모습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종북주의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아무튼 현행의 비민주적인 선거법 하에서 예비후보자와 배우자들은 추운 날씨에도 명함배부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도 거리에 나섰다. 명함을 나눠주면서 “제가 남편입니다”라고 말하면 명함을 받지 않으려던 사람들도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아줌마들이 남편이 아내의 선거운동을 돕는 모습을 좋게 보아주고, 격려를 해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남편의 지지호소도 외면당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특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분들은 거부감을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심지어 어떤 남자분은 “마누라 단속이나 잘 하시오”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나에게서 받은 명함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길바닥에 휙 던진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조금 뒤에 보니까 담배꽁초도 길바닥에 휙 버린다.  나는 정치인 유승희의 적극적인 지지자이다. “그야 남편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팔이 안으로 굽는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고, 유승희에 대한 나의 평가가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과 정치인으로서의 아내를 지지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한때 내 아내가 정치를 그만두고 미국에 와서 미국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나를 내조해주기를 바라고, 이를 요구한 적도 있다. 지금도 외조하는 삶보다는 내조받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점점 더 기쁜 마음으로 외조를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내가 정치인으로서의 유승희를 좋아하고 열렬히 지지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정치인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자들은 열심히 자원봉사를 하는데, 하물며 남편인 내가 존경하는 정치인인 유승희를 위해 열심히 자원봉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는 정치인 유승희를 존경하고 지지한다. 그리고 나는 정치인 유승희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다. 단순히 금뱃지를 달고 말고에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금뱃지를 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정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데 의미있는 역할을 하느냐 여부이며, 금뱃지가 이러한 역할을 더 잘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솔직히 나는 거들먹거리는 국회의원들, 목에 힘주는 정치인들을 경멸한다. 나의 아내라 할지라도 선거 때는 표를 얻기 위해 굽신거리다가 당선되고 나면 서민들이 만나기 힘든 높으신 분이 된다면, 그런 정치인을 나는 지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유승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유승희가 한국의 정치발전을 위해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세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유승희의 의미있는 역할 세가지 첫째, 한국 정치선진화의 핵심적 과제 중 하나인 여성 정치참여 확대를 위해 유승희는 그동안 상당한 기여를 해왔고, 앞으로 더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국제적으로 여성의 정치참여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꼽은 ‘여성이 살기 가장 좋은 곳 순위’에서 한국은 건강(92.9), 교육(91.9)에선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정치 (25.9),  경제(66), 법적 지위(76.1)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종합점수 69.6점으로 조사대상 165개국 중 80위라는 창피한 순위를 차지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는 165개국 중 138위로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우리의 딸들에게 살기 좋은 나라를 물려 주려면 여성정치참여 확대가 절실함을 보여준다. 여성 국회의원의 수가 18대 국회의 경우 전체의 13.7%로서 과거에 비해 증가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스웨덴 (47.3%)과 같은 선진국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신생민주국가에 비해서도 낮은 형편이다. 특히 지역구에서는 여성국회의원의 수가 245명 중 14명 으로 5.7%에 불과하다. 지방자치단체장의 경우 역대 광역단체장 중에 여성이 한 명도 없었고, 기초단체장의 경우도 현재 228명 중 6명 (2.6%)에 불과하다. 이는 민주정치의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인 대표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며, 여성의 대표성을 높이는 것이 우리 정치발전의 중요한 과제임을 보여준다. 유승희는 그동안 그 누구보다도 여성정치참여의 확대를 위해 실천적으로 노력 해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여당 여성국장으로서 비례대표 50% 여성할당 의무제도와 지역구 여성할당 30% 권고조항 입법에 기여했고, 민주당과 민주통합당 의 전국 여성위원장으로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15% 공천 의무조항을 관철시킨 것은 한국의 여성정치 발전사에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다. 특히 지역구 30% 공천 권고조항이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는 상황에서 최소한 15% 공천을 의무화하는 당헌 ∙ 당규 개정을 위한 논의과정에서 민주당의 당 개혁특위는 물론 막바지에는 민주당의 통합수임기구와 민주통합당의 최고위원회에서 여러 차례 엎치락뒤치락 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유승희 전국 여성위원장의 끈질기고 당찬 리더십 없이는 15% 의무조항이 거의 무산될 뻔 했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인정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개혁을 위한 노력과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승희가 자신이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성북갑에서 2010년 지방선거에 여성후보를 대거 공천해서 당선시켰다는 것이다. 지역구 기초의원 후보 7명 중 여성후보를 5명 공천했고, 이중 3명이 당선되어 비례대표까지 포함하면 기초의원 당선자 6명 중 4명을 여성으로 배출하는 전국 최다여성공천, 최다 여성당선을 기록한 것이다. 지방의회 의원후보 공천에 지역위원장의 영향력이 큼을 감안할 때 이는 유승희의 여성정치참여 확대에 대한 의지가 공허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진정성을 가진 실천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준다. 이는 그동안 어떤 선배 의원들도 하지 못한 일을 아직 지역기반이 취약한 원외 여성 지역위원장이 해 낸 것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다. 둘째, 심화되는 양극화를 해소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지난 30년간 한결같이 노동자와 서민의 벗으로서, 대변자로서 일해 온 유승희야말로 한국정치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믿는다. 말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늘상 만나는 것은 1%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고 서민과의 소통은 형식적으로 보이기 위해 하는 정치인들이 한국정치의 주류 를 차지하는 한 서민들은 진정한 대변자를 가질 수가 없다. 유승희가 지역 당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면 진정성이 느껴진다. 많은 정치인들과 달리 유승희는 서민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이야기와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는다. 과거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하던 시절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유승희는 원외시절과 마찬가지로 지역구의 서민들과 소통하고 이들을 대변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할 것임을 믿는다. 유승희가 시각장애인인 시누이를 정성껏 대하는 것을 보아도 유승희는 항상 약자와 소외된 자와 함께 하는 체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로 지역위원장 시절에 서울맹아학교와 농아학교에 화장실 확장을 위한 증축을 실현시킨 것은 오랫동안 해당 지역구의 국회의원들이 하지 못하던(않았던?) 일을 진심으로 성의껏 노력한 결과였다. 17대 국회의원 시절 여당 의원으로서 이라크 파병에 반대한 것도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할 경우 희생을 당할 젊은이들은 특권층이 아니라 서민들의 자녀들일 것인데, 서민의 대변자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불공정한 한미FTA에 대해서도 당시 청와대와 당 지도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반대 입장을 고수한 것은 한미FTA로 이득을 볼 계층은 극소수의 재벌과 수출대기업뿐이고 농민과 중소상공인 등 대다수의 서민에게는 피해가 더 클 것이 예견되는데도 서민의 대변자로서 이를 모른 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으로서 발신자번호표시 무료화를 관철시켜 낸 것도 서민의 벗 유승희의 실천적인 의지와 역량을 입증하는 예이다.